李 聖九 (고려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제1부

제52회 예장(고신) 총회 신학부의 이성구 박사 논문 평가를 평가함

        필자는 어쩌면 불필요할 수 있는 이 글을 쓰기로 작정하면서 벨릭스와 베스도,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의 심정을 떠올리게 된다. 사도행전 24장 이후에 계속되는, 자신을 고소하는 유대인들(소위 정통파)에게 대한 바울의 변증은 필자의 심정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행전24:14-16)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행전 24:20)--MORE--

        바울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다 믿으며 유대인들이 가진 것과 꼭 같은 소망을 가지고 양심에 거리낌없이 복음을 믿고 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다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방에 있는 유대인들을 가르치면서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고 주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바울을 죽이려 하였다. 그는 자신을 고소하는 자들을 향하여 자신이 도대체 공회 앞에서 무슨 옳지 않은 말을 하였는지 말해보게 하라고 관리들을 향하여 권고하고 있다. 자신은 오직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구약 성경을 믿으며 그 성경이 말하는 소망을 증거 하였을 뿐임을 거듭거듭 확인하고 있다.
        심각한 오해에 휩싸여 고소 당하고 결박당한 바울의 경험은 오늘 필자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고 있다. 오늘 이 글을 쓰는 필자가 가진 심정이야말로 바울의 경우와 너무나 흡사하다. ‘도대체 내가 지난 90년 봄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 13년간 수없이 행한 설교와 학교 강단에서 가르친 내용 가운데서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1. 신학부 보고서 분석
        1) 제52회 총회 신학부(부장 김재성)는 필자의 논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대담한 평가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제목: 이성구박사의 논문에 대한 신학부의 평가
        총회에서 맡긴 이성구 박사의 논문 번역 및 평가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보고하오니 살피시고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 아 래 -
1. 학위 논문명: Election and Ehtics (in the prophecy of Amos-  변교수의 보고서를 베끼면서 괄호안을 빠뜨림), 1990. A thesis submitted in partial fulfilment of the requirements of the Council for National Academic Awards for the Degree of Doctor of philosophy, Trinity College, Stoke Hill, Bristol. (아모스의 예언에 나타난 선택과 윤리)
2. 논문번역 및 평가: 변종길 신득일 박영돈 교수에게 번역과 평가를 의뢰하여 신학부 실행위원(회?)에서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성구 박사의 학위 논문은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에 대한 연구이다. 학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논문이며, 여러 학설을 많이 소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점을 제기한다.
        2) 전체적으로 아모스 예언의 배경을 그 이전의 어떤 전승(tradition)에서 찾는 데 이것은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하나님의 계시’(신적 영감성)가 부인되었다.
        3) 본 논문은 여러 부분에서 독립된 다양한 전승이 하나의 단위로 결함해서 형성되는 과정을 언급하고 그리고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원인론적으로 허용의 여지를 주는 것은 성경의 역사를 뿌리 채 부인한다.
        4) 더 나아가 (신명기의 -신득일의 평가를 보고 베끼면서 빠뜨린 것으로 보임)후대 기록에 대한 언급이나 오경의 단일 저작성을 부인한다.
끝.
신학부장 김 재성

        2) 그런데 문제는 이 보고서가 심각한 자기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 이 보고서는 평자들이 제기한 질문들에 대하여 저자의 견해를 듣는 과정을 전혀 무시하고 평자들의 견해만을 반영하고 있다. 박사학위 논문은 매우 까다로운 성격을 띄고 있으며 전문성을 가진, 그러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담은 글이다. 따라서 얼마든지 잘못 이해될 수도 있고, 한정된 주제를 다루는 글이므로 그 논문만으로는 내포된 문제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평자들이 몇몇 단어나 구절만을 집어내어 평자 자신의 결론을 추출할 위험성은 항상 존재한다. 때문에 학문 전공 분야별 학회들이 논문발표회를 열 때면 대개 2,3명의 논평자들을 미리 지정하고 토론을 전개한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오해를 풀기도 하고, 논지나 논술방법을 더욱 분명히 할 필요를 발견하기도 한다. 어떤 논문도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고, 어떤 평자도 한 논문으로 저자의 사상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는 법이다. 참고로 밝히는 것은 세 명의 평자 중 한 분은 전공분야가 아님을 이유로 평가하지 않았고, 한 분은 구약학을 전공하지 않아 분석과 판단에 한계가 있음을 밝히면서 의문을 살 수 있는 몇 가지 점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다. 다만 마지막 한 평자는 구약을 전공하였으나 아직 학위논문을 써 본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한계인 약간의 단정적인 표현을 동원하다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추론을 절대화시키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둘째, 논리적으로 모순된 진술을 하고 있다. ‘학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논문이며....그러나 이 논문은 몇 가지 의문점을 제기한다’고 말하고서는 의문이 아니라 ‘부인되었다, 부인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재고의 여지가 전혀 없는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전부 목사들로 구성된 신학부라면 교회의 학교인 신학교수의 마음을 헤아리고 의문은 풀도록 노력하여야지 그야말로 ‘이단으로 단정하는’ 어이없는 결론을 저자에게 질문 한 번해보지 않고 마음대로 도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잘못 제기되었을 수 있는 의문을 상대방을 ‘죽이는 도구’(이 말은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목사요 신학교수가 성경의 계시성을 부인하거나 성경의 역사를 뿌리 채 부인한다면 그는 이단이요, 영원히 죽어야 할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로 사용하는 행위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중세의 교회가 위클리프며 틴데일을 성경을 번역한다는 이유로 죽음으로 몰고 간 부끄러운 역사를 안다면, 제기된 의문을 단정의 자료로 삼아서는 역사에 심각한 과오를 저지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셋째, 이 보고서는 스스로 신학부에서 세 명의 교수에게 번역과 평가를 의뢰하여 결과를 도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나, 신학부 보고서의 결론과 같은 확정적이고 단정적인 평가는 평가서를 제출한 두 교수의 글 - 물론 두 평가서는 곧 다른 각도에서 비판을 받아야 하지만 -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신학부가 내린 결론은 근거가 없는 악의적 판단이라는 말이 될 수 있다. 신학부가 내린 결론대로라면 필자는 교수는 물론, 목사,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자격도 갖추지 못했다고 해야 한다. 성경의 역사와 계시성을 부인하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확신하여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신학부의 보고서는 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이단(異端)시 한’ 엄청난 결론을 담고 있다. 훗날 누군가는 이러한 ‘돌이킬 수 없는 확신에 찬 단정’을 공식 문서화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2. 평가자들의 평가 분석
        따라서 논문의 저자인 필자는 신학부의 보고서에 대하여 응답하기 전에 먼저 평가서를 제출한 두 평자의 견해를 분석하고 그 평가서들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질문에 대하여 우선 가능한 한 간단하게 응답할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제 2부에서 오해의 근거를 살피는 과정을 통하여 폭넓고 상세하게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2.1 변종길 교수의 평가와 분석
    1) 평가 내용
        변종길 교수는 필자가 신대원 교수로 임용되던 때 인사위원회에서 논문에 관하여 토론할 때 제기하였던 의문을 그대로 다시 제시하고 있다. 신학부의 요구에 억지로 응하면서 제출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와는 이미 토론을 끝낸 상황이기 때문이다. 변종길 교수는 네 가지로 나누어 문제점을 제기한다.
        ① 아모스 예언의 배경을 어떤 ‘전승(tradition)'에서 찾는 데, 자칫 하나님의 계시라는 측면이 무시 내지는 약화될 위험이 있다.
        ② 선지자들을 파로 나누는 데, 이것은 곤란한 것 아닌가?
        ③ 이스라엘의 예언 현상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은 선지자의 신적 기원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 아닌가?
        ④ ‘제 2이사야’라는 표현은 인용인지 자신의 견해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면서 변교수는 자신의 의문을 다시 한가지로 요약한다. 아모스 예언의 배경을 전승에서만 찾는 것은 그의 문학적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더라도 예언을 너무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고찰하는 것이어서 신적 기원의 측면이 무시될 수 있다는 염려가 주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 분석과 응답
    ① 전승과 계시성
        무엇보다 전승을 찾는 것과 계시성을 말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관점자체의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아모스서는 이미 1:1절에서 자신이 행하는 예언을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받은 말씀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언의 근본적인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필자는 논문에서 이미 그것을 밝혀놓고 있다. 다만 필자나 학자들이 하는 작업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아모스가 도대체 어떤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었는가를 찾아볼 뿐이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구약총론’이라는 과목이 성경 각 책의 저자, 연대, 전승과 보존의 과정, 특성 등을 다룬다. 성겨의 제 1저자이신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되 제2저자인 인간 저자가 가진 모든 자질과 특성을 사용하신다는 것이 개혁주의 정경론이다. 정경이 완성되지 않은 때에, 후에 상세하게 서술하겠지만 선지자들이 오경보다 앞서 기록되었다고 주장되던 1980년대의 구약학계의 일반적인 상황에서, 아모스가 앞선 이스라엘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주장이 계시를 받은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시로 받은 아모스’가 나름대로의 문학적 기법 (shock-effect, word-play 등)과 역사적 지식 (2:11이하 등)을 동원하여 예언하고, 그의 설교가 모세 언약적 배경과 지혜의 전통들을 담고 있다고 하는 논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평자의 느낌일 뿐, 저자의 사상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현존하는 그 어떤 주석자나 성경해석자도 이러한 보편적인 해석원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② ‘선지자를 파로 나누는 데(p.44) 참 선지자의 경우에는 곤란하다’는 평가는 전적으로 평자의 오해에 근거한다. 필자는 일부의 비평학자들이 아모스가 자신의 말대로 선지자도,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면 어떻게 국제적 사건들과 성스러운 전통, 제사 의식들, 연설의 기술, 사회현상들을 그렇게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의심스러워하면서 선지자가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예언자들이 전달받은 전통은 남쪽과 북쪽이 다르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들에 대하여 예언을 지역으로 분리하여 다른 전통이 전수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주장을 했을 뿐이다. 그 어디에도 필자가 스스로 선지자가 어떤 파들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 곳이 없다. 변교수는 근거로 지적한 필자의 논문 44페이지를 지나 45페이지를 자세히 읽었어야 했다고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국가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온 이스라엘에 걸친 선지자들의 활발한 사역을 통하여 더 오래된 고대의 전통이 보존되었고, 아모스는 그 더 오래된 전통들을 양국(兩國)에 흩어져 있는 다른 농촌 사람들과도 공유하고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파를 나눈 것이 아니라 나누어져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을 뿐이다.

        ③ 구약 선지자들이 행한 것과 유사한 현상을 일으키는 존재들을 근동의 타 문화권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학자들의 연구로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보수주의 구약학자 레온 우드는 고대의 예언현상에 대한 연구에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비록 주변 국가들의 예언과 이스라엘의 예언사이에는 약간의 유사점도 존재하지만 이스라엘이 그들로부터 그것을 전수했다는 증거가 될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 예언의 독특성은 나타난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맡은 역할에 있다고 하는 것 역시 레온 우드의 주장과 일치한다. 레온 우드는 8가지 영역과 역할의 차이에서 근동예언과는 다른 이스라엘 예언의 독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내세우는 차이는 연대적 차이, 인류에 대한 유익 여부, 지속성, 예언자의 헌신성, 죄의 지적, 하나님과 예언자의 밀접한 관계성, 사회적 신분, 형벌정도의 차이 등이다(p.48ff.).
        이런 모든 주장은 이스라엘의 예언을 근동국가들로부터 배웠다거나 동일시하는 비평학자들에 대응하여 신적 기원을 증명하려는 시도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정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평자는 필자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문화적 전통은 전부 가나안 종교나 이웃 문화에서 배우거나 빌려왔을 것이라는 종교사학파들의 주장에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여 그와 같은 지적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④ ‘제 2 이사야 Deutero-Isaiah’ 란 표현을 필자가 굳이 따옴표를 표시하여 사용한 것은 그러한 표현이 학계에 통용되는 용어임을 명백히 하였다. 우리는 쉽게 이사야의 통일성을 말하지만 이사야서를 둘러싼 여러 가지 질문은 이사야서의 통일성에 대한 주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가 남아있다. 그러나 저자의 논문이 그것을 변증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므로 그저 시대 상황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사야서 후반부가 그리고 있는 부분을 포함시킨 것 뿐이다.

        3) 결론
         변종길 교수가 평가하는 내용은 전문 연구 분야의 차이로 인하여 저자의 논지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보이며, 필자가 다루는 주제와 직접적으로 상관되지 않은, 논란의 가능성이 있는 부분에 대한 일과성 언급에 대하여 미흡한 느낌을 받아 의문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 저작 속에 모든 주제를 다룰 수 없는 한계는 변교수도 잘 인식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98년도에 이미 필자와 토론을 거친 사실을 적시하지 않고 신학부의 독촉으로 원점에서 다시 그대로 제기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낀다.

   2.2 신득일 교수의 평가와 분석
             1) 평가와 분석
          신득일 교수는 고신대학 신학과 소속으로서 필자의 신대원 후배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대화나 교제의 기회를 한 번도 가질 수 없는 관계였고, 필자는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가 신학부로부터  선배학자에 대하여 평가를 요청 받은 이후 선배 목사요 교수인 필자에게 단 한 번이라도 의문에 질문을 제기 하거나 개인적인 대화를 요청한 적도 없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이 개혁주의 신학의 잣대가 되는 것처럼 필자의 논문이 ‘개혁주의와 거리가 멀다’며 공적으로 자기 개인의 견해를 밝히는 것은 솔직히 오만하게 비쳐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선 간단하게 그의 주장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긍정적 평가
          그는 필자의 논문이 ‘아모스 예언에 나타난 선택 사상과 윤리가 아브라함의 전승에 근거한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 문학적으로 주석적으로 연구한 것이다 저자는 방대한 중요한 자료를 사용하여 더 이른 시기의 전승에 아모스가 호소하고 있다는 주장을 학문적으로 치밀하게 전개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일단 전체의 숲을 보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그렇지만 아쉬운 것은 서술과정에서 비평학과 관련된 의심스러운 진술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라며 ‘의심스러운 진술’, ‘아쉬운 것’이란 표현으로 매우 조심스러운 접근을 보이고 있다. 학자적 소양이 있다면 당연히 사용하는 표현법을 적용하고 있어 대화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게 한다.

        3) 부정적 평가
        그러나 그는 글을 이어가면서 점점 속내를 드러내며 거칠어지고 있다.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요약이 가능하다. 다른 이유에서지만 변교수가 염려하는 대로 역시 구약의 신적 기원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기 짐작에서 나온 결과가 주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사실 필자는 신교수의 주장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계시는 하나님께서 제2 성경 저자의 역사적 지식과 인격, 경험, 능력을 사용하여 전달하는 것이지, 진공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는 설명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독자들의 오해를 막기 위하여 일일이 분석하고 응답하려 한다.

        ① 비평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주장
         응답: 그는 학위논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논문이란 저자가 다루고자 하는 하나의 주제에 모든 힘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필자의 논문은 비평학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논문이 아니다. 필자의 비평학에 대한 입장은 ‘성경해석과 비평’이라는 논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

        ② 400회 이상 사용된 tradition 이라는 애매한 표현의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다는 주장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전통에 대한 견해를 나열하고, 필자를 자신이 내린 규정에 따라 재단하고 있다. 즉 ‘전승은 역사를 포함하지만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라고 규정하고 필자가 그랬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려한다.
        응답: 전통이 역사를 포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자신의 해석이다. 필자는 ‘전통’이라는 용어를 역사를 배제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예언자들이 어떤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가가 학계의 첨예한 논쟁 대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는 데 그 용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예언과 예언자 문제를 다룰 때 전통, 즉 언약적 전통, 지혜 전통, 제의전통과의 관계 문제는 80년대까지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모든 전통이 기록으로만 전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조금이라도 학문의 흐름을 안다면 평자가 ‘전통이란 말은 역사를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은근히 비판하려 드는 행위가 온당치 않음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일이다. ‘개혁주의 역사와 전통’, ‘고신의 역사와 전통’이라는 말이 개혁주의 역사나 고신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용어일 수 있다는 말인가?

        ③ 방법론적으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승사 비평에 동조하고 있다는 주장. 이유는 다양한 전승이 하나의 단위로 결합해서 형성되는 과정을 언급한다고 비판.
        응답: 전승사 비평에 동조하는 것과 전승사학파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주장에 대응하는 것과의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필자는 아모스 예언의 배경을 살피면서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스라엘의 전통 형성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학설들을 종합하고 분석하여 결국 그들의 주장이 타당성이 없다는 점을 밝히려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언약, 제의 전승이 북국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에서 각각 다르게 형성된 것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아모스는 남쪽 유다 사람이었으므로 북쪽에서 보존된 모세언약 전통은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응한 것이 필자의 진술방식이었다. 그 가운데 비평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사용한 것을 두고 전승사 비평에 동조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④ 성경의 역사에 대한 확신을 유보하는 표현이 보인다는 주장
        응답: 이 주장의 근거로 그는 52, 98, 157페이지를 언급하고 있다. 52쪽은 예언의 근원에 대하여 기술하는 부분이다. 예언과 예언자의 직분의 근원을 논하면서 모세가 예언자직분의 근원이라고 하는 주장과 메닷과 엘닷(민11)의 경우를 들어 모세와는 다른,  제의 제도 밖의 선지자 제도가 ‘의심할 여지없이 신적 기원을 가진 모세의 정신으로부터 나온 환상적 예언을 합법화’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블렌킨솝의 주장을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53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Prophecy as the 'proclamation of divine messages in a state of inspiration' might well have existed from the earliest stage of Israel's history in somewhat different forms in which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divine and human being is constantly expressed.' 영감의 상태에서 신적 메시지를 선포하는 행위로서의 예언은 조금은 다른 형태들로 그것을 통해 신과 인간의 관계가 끊임없이 표현되도록 하면서 이스라엘 역사의 최초단계에서부터 당연히 존재해 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 어디에도 성경의 역사를 유보하는 입장을 보인 적이 없다. 98페이지에서 아브라함 네러티브와 아모스를 비교하면서 아모스가 아브라함 네러티브에 나타난 선택신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면서 아브라함 기사가 ‘회상적 서사시든 retrojective epic' 역사적 네러티브든, ’오랜 경험에서 나온 사회적 실재의 잔재 enbalmed relic of experiential social reality'이든 상관없이 그러하다고 한 것을 두고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창세기 연구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알면 금방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창세기 기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벌써 세기를 두 번 넘긴 지난한 과제이다. 우리 입장에서야 한마디로 말해버리면 그만이지만 학자로서 자신의 입장을 펴려면 입증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필자는 논문을 통해 창세기를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인식하는 비평학자들을 상대로 창세기 기사의 아모스 선재(先在)설을 주장하고 입증하려 하고 있다. 말하자면 창세기의 연대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 우리 입장이라면 필자와 같은 작업을 할 필요조차 없다. 단지 선택신학과의 관련성만 주장하면 된다. 그러나 창세기 기록의 고대성을 믿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 기록의 고대성을 입증하는 것은 엄청난 작업까지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필자는 그 기록의 시기나 성격과 상관없이 아모스는 아브라함의 기사에 나타난 특정의 선택신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주장을 통하여 거꾸로 창세기의 고대성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고신, 화란, 남아를 거치면서 비판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는 평자의 한계를 보게 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신교수가 157페이지를 언급한 것은 Jacob-Esau saga라는 표현 때문으로 보이는 데 이것은 제2부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학문적 미숙에서 빚어진 해프닝 성 발언으로 보인다.

        ⑥ 원인론에 대한 허용의 여지를 주는 것은 성경의 역사를 뿌리 채 부인하는 위험에 노출될 것이라는 비판 (66,158)
        신교수가 얼마나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고 있는지 바로 이 지적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원인론적 etiological’ 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66페이지를 보자.
        However late the date of the final writing of the biblical books concerning early history may be, it is certainly impossible to prove that they are all merely imaginative, retrospective and etiological. 이스라엘의 초기역사에 관한 성경의 최종 기록시기가 아무리 늦다고 할지라도 그 기록들이 전부 단순히 상상의 산물이거나, 회상적, 원인론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비평학자들이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가 기록된 오경의 시대를 늦게 잡으려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입증의 기회를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당신들이 그렇게 늦은 연대를 주장해도 그 기록의 내용이 결코 상상의 산물이거나 원인론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단언하는 필자가 어떻게 원인론에 대한 허용의 여지를 주는 것이며, 그게 어떻게 성경의 역사를 뿌리 채 부인하는 위험에 노출된다는 말인가? 어이없는 주장에 할 말을 잃게 된다.
        158페이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양보절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기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필자는 왜 아모스가 굳이 에돔에 대하여 그렇게 적대적인가를 규명하려 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국가적 적대 관계를 야곱과 에서의 개인적 문제에서 발생한 것으로 표현하는 창세기 기사를 두고 비평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원인론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논란에 빠져들 수 없는 상황에서 필자는
        ‘그 이야기(야곱과 에서)의 원인론적 성격이 부인될 수 없다하더라도 질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이 하필이면 특별히 에돔과 이런 식으로 대비가 되어야 하는가? Even though the etiological nature of the story cannot be denied, the question remains: why did Israel have to be specifically contrasted to Edom in this way?...'
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증명하는 과정을 가질 수 없으니 그렇게 인정된다고 치더라도, 유독 에돔만을 시비의 상대하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 이야기가 결코 어떤 일을 후에 설명하기 위하여 채용한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원인론적인 기사일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역사를 뿌리 채 흔드는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인가? 그 단어 하나에 성경의 역사가 흔들릴 수 있다는 말인가? 성경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책이 아니다.

        ⑦ 신명기의 후대 기록에 대한 언급이나 오경의 단일 저작성을 부인하는 표현도 아쉬운 부분이라는 주장 (62, 170)
        2부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신명기가 오경의 다른 책보다 후대에 기록된 책이라는 주장은 개혁주의 입장과 전혀 다른 주장 가운데 비평학계에서 가장 일반화된 학설중의 하나이다. 62페이지에서 필자는 ‘신명기가 고대 전통을 중시하는 그룹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다’는 점을 지적하며, 비평학자들 가운데 일부가(Nicholson) 신명기의 북쪽 기원론을 주장하며 ‘왕정시대 이전 지파동맹 시대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인용하며 주전 7세기론 만이 신명기 기록의 시기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신명기 7세기론이 대세를 이루는 상황에서 신명기 기록을 왕조 이전 시대로 끌고 올라가려는 힘든 시도의 일부분이다. 도대체 누가 오경의 단일저작성을 부인한다는 말인가? 신교수는 오경의 단일 저작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쉬운’ 정도라고 표현할 만큼 비평학에 관대한 사람이라는 말인가?
        신교수는 170페이지의 기록을 두고 필자가 신명기가 후대 기록이라고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거기서 필자는 노예제도에 관한 법을 비교하면서 (출21:2-11, 레25:39-46, 신15:12-17) ‘오경의 법들은 자신의 몸을 이웃에게 파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지 사는 사람 자신이 노예매매 활동에 대하여 경고를 받은 흔적은 전혀 없다’고 하면서 'there is no indication at all in the laws, even later in Deuteronomy'라고 한 사실에 근거하여 신명기를 후대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고 비판하고 있다. 언뜻 보면,  즉 신명기의 연구상황을 전혀 모르는 일반 독자가 읽으면 오해할 여지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박사학위 논문은 일반독자를 위한 책이 아니다. 앞서 밝힌 대로 신명기 7세기 설이 보편성을 띈 상황이라 오경의 다른 법과 신명기 법에 차이가 있음을 밝히는 연구 역시 많이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늦다고 말하는 신명기 (필자는 출애굽기나 레위기보다 신명기는 40년 가까이 늦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듣기에 따라서는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있다는 말이다)에서도 필자가 주장하는 것에는 전혀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역시 어떤 논지를 위한 주장인지를 제대로 검토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어떤 책이든 책읽기는 그저 비판거리를 찾아내려는 자세보다 이해하려는 자세로 읽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이다.

        3) 결론
         결국 신교수는 비평학계의 오경연구에 대한 이해 부족인지, 타인의 주장을 경청하고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분위기에서 학위논문을 써 보지 않은 경험 부족인지, 아니면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하여 필자의 논문을 무조건적으로 비하하려는 의도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필자의 논문을 평가하면서 학문적 탐구의 자세보다는 마치 자신이 신학의 심판자나 표준이 되는 것처럼 사고하며 행동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를 고치지 않는 한 우리의 신학이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기여하는 날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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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9 16:47 2004/03/0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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